문학

적막 / 박남준

질경이" 2005. 12. 11. 01:36

 

박남준 시집 <적막> 창비시선 256. 2005.12.07


 

 

 적막강산에 뿌리내린 한 그루 나무 

 

 

 

 새 시집을 손에 쥐고는 한참 떨렸다. 지금 읽지 말고 집에 가서 읽자. 집에 가기 전 술부터 취했다. 작취미성의 멍한 눈으로 시집을 펼친다. 참 적막강산이다, 이 시집의 풍경들은.

 박 시인은 쉰을 바라보는 지금까지 최소한의 일용할 양식만으로 모악산 움막집에서 10년을 살았고, 3년 전에는 지리산 자락 하동 악양으로 거처를 옮겨 여전히 홀몸으로 살아간다.

 시인의 1개월 생활비는 15만-20만원 정도. 담뱃값 외에 한달에 한번쯤 '비린 것'이 그리워 하동장이나 구례장에서 고등어나 갈치를 사먹는 비용 외에는 별다른 생활비가 들지 않는다고 한다. 산문 한 편의 원고료면 한 달을 생활할 수 있다고 한다.

 그의 저금통장에는 200만 원 이상 쌓이지 않는다. 혼자 살기 때문에 세상을 떠났을 때 남에게 신세를 지지 않으려고 준비해두는 최소한의 비용이다. 그 이상의 돈이 쌓이면 찾아 복지시설 등에 보낸다.


 

 

이사, 악양


결국 남쪽 악양 방면으로 길을 꺾었다

하루 종일 해가 들었다

밥을 짓고 국을 끓이며

어쩌다 생선 한 토막의 비린내를 구웠으나

밥상머리 맞은 편

내 뼈를 발라 살점을 얹어줄 사람의

늘 비어있는 자리는 달라지지 않았다

이따금 아직도 낯선 아랫마을 밤 개가

컹컹거리며 그 부재의 이유를 묻기도 했다

별들과 산마을의 불빛들은

결코 나뉠 수 없는 우주의 경계로 인해

밤마다 한 몸이 되고는 했다

부럽기도 했다 해가 바뀔수록

검던 머리 더욱 희끗거리고

희끗거리며 날리는 눈발을 봐도

점점 무심해졌다

겨울바람이 처마 끝을 풀썩 뒤흔들며 간다

아침이면 창을 비워두는 것은 옛 버릇이나

무덤을 앞둔 여우들이 그러했듯이

나 또한 북쪽 그리운 창을 항해 머리를 눕히고

길고 먼 꿈길을 청한다




학생부군과의 밥상


녹두빈대떡을 참 좋아하셨지

메밀묵도 만두국도

일년에 한 두 어 번 명절상에 오르면

손길이 잦았던 어느 것 하나

차리지 못했네

배추된장국과 김치와 동치미

흰 쌀밥에 녹차 한 잔

내 올해는 무슨 생각이 들어

당신 돌아가신 정월 초사흘

아침밥상 겸상을 보는가

아들의 밥그릇 다 비워지도록

아버지의 밥그릇 그대로 남네

제가 좀 덜어 먹을게요

얘야 한번은 정이 없단다

한 술 두술 세 숟가락

학생부군 아버지의 밥그릇

아들의 몸에 다 들어오네

아들의 몸에 다 비우고 가시네

 

흰 머리만 빼면 아직 중학생같은 모습. 시집 맨뒤 시인의 말에서 그는

"시를 찾아, 시에 갇혀, 결국 여기까지 왔다"고 말한다.

 

 

외삼촌 찾으러 갈 테다


장기수 할아버지 북으로 떠나는 송별잔치에서

인사드렸던 몇 분의 손에 건네주었다 이런 쪽지. 외삼촌 찾아 주세요



박   남   준: 시인, 1957년 법성포 출생

아   버   지: 박상혁(1921년 음력 11월 8일생)

어   머   니: 이갑경(1924년 음력 9월 23일생)

외할아버지: 이희복(1902년생)

                  1957년 대남 공작원으로 남파

                  1961년 검거

                  1962년 대전교도소에서 옥사

이         모: 이갑진

                  빨치산으로 활동

                  1954년경 대전교도소에서 옥사

외   삼   촌: 이순원(1927년 음력 7월 16일생 아명은 용운,

                  황해도 해주에서 사신다고 함


나 태어나던 해 어느 밤

간첩이라는 이름으로 사위집을 찾으셨던 외할아버지

외삼촌은 그때 해주 어디에 사신다 했지

외할머니는 아들과 함께 오지 않았다고 끝내 방 빗장을 걸어 잠갔고

도란도란 딸과 사위 앉혀놓고 밀린 정담 나눴을까

김 나는 밥 한 그릇 맛나게 드셨을까

외할아버지 통행금지 풀린 새벽길을 떠나셨다지

얼마나 무섭고 떨리는 밤이었을까 그 밤

얼마나 서럽고 가슴 미어지던 밤이었을까

몇 년후 그 딸네 집 풍비박산 났었지

끌려가고 두드려 맞고 서대문형무소 옥살이하고

불고지죄로 풀려나셨지요

사위가 장인을 신고 안한 죄

딸이 아버지를, 아내가 남편을 신고 안한 죄

어머니, 어머니는 어머니의 아버지의 무덤도 모르신다지요


외삼촌의 얼굴 기억하는 이들 하나둘 세상을 뜨고

어머니와 막내이모 그만 두 분만 남았는데

이산가족상봉 신청서 아들 몰래 내고

몇해째 무소식에 애 끓이시던 어머니 아직은 눈감지 마세요

당신이 그랬듯 나도 슬쩍 북으로 가는 인편에 소식 띄웠는데

삼년이 지났어요 이 지척의 땅 이제 내가 가야겠어요

저 분단의 철조망이나 압록강을 무단 건너서라도

살았는지 죽었는지 양단간에 소식 기어지 물어올 테니

기다리세요 그날까지 꼭꼭 기다리세요

 

 

 

칼을 들고 목각을 해보고서야 알았다

나무가 몸 안에 서로 다른 결을 가지고 있다는 것

촘촘히 햇빛을 모아 짜 넣던 시간들이 한 몸을 이루며

이쪽과 저쪽 밀고 당기고 뒤틀어가며 엇갈려서

오랜 나날 비틀려야만 비로소 곱고

단단한 무늬가 만들어진다는 것

제 살을 온통 통과하며

상처가 새겨질 때에야 보여주기 시작했다

 

 



먼 강물의 편지


여기까지 왔구나

다시 들녘에 눈 내리고

옛날이었는데

저 눈발처럼 늙어가겠다고

그랬었는데


강을 건넜다는 것을 안다

되돌릴 수 없다는 것도 안다

그 길에 눈 내리고 궂은 비 뿌리지 않았을까

한해가 저물고 이루는 황혼의 나날

내 사랑도 그렇게 흘러갔다는 것을 안다

안녕 내 사랑, 부디 잘 있어라

 

 



이름을 부르는 일


그 사람 얼굴을 떠올리네

초저녁 분꽃 향내가 문을 열고 밀려오네

그 사람 이름을 불러보네

문밖은 이내 적막강산

가만히 불러보는 이름만으로도

이렇게 가슴이 뜨겁고 아플 수가 있다니



화살나무


그리움이란 저렇게 제 몸의 살을 낱낱이 찢어

갈기 세운 채 달려가고 싶은 것이다

그대의 품 안 붉은 과녁을 향해 꽂혀 들고 싶은 것이다

화살나무,

온몸이 화살이 되었으나 움직일 수 없는 나무가 있다

 

 

 


왜가리

 


필경 넋이 난 것이다


한 점 온기도 남지 않은 앙금 같은 흰 재

또는 처절하도록 팽팽한 제 몸을 당긴 시위


저 부동은 어디에서 왔나 어디로 가는가


마른 연 줄기들 몸을 꺾은 겨울 방죽 가


오래전 고요한 외다리 왜가리

 

 

 

 아득하다. < 이사, 악양>이나 <학생부군과의 밥상> 그리고 <외삼촌 찾으러 갈테다>에서는 그의 순탄치않은 가족사와 함께 밥상을 마주할 이 없는 고독, 즉 `없는 가족'에 대한 근원적 고독과 함께 어떠한 이유로 스스로 선택한 고독이 공존한다. 그는 왜 스스로를 유배시킨걸까. 그는 고행의 은자인가, 아니면 여항의 배회자인가?

 쉰 살을 앞둔 그에게서 조금은 어리광같은 사랑의 시어들도 눈에 뛴다. 들키고 싶은 걸까?

"초저녁 분꽃 향내가 문을 열고 밀려오네/.../이렇게 가슴 뜨겁고 아플 수 있다니"<이름을 부르는 일>라고 속내를 내보이거나 "한해가 저물고 이루는 황혼의 나날/ 내 사랑도 그렇게 흘러갔다는 걸 안다/ 안녕 내 사랑, 부디 잘 있어라"<먼 강물의 편지>처럼 감정의 강물을 범람시키기도 한다.

 

그러나 이 시집의 많은 부분은 자연 속에서의 깨달음이다. 그는 나무와 한 몸이다.  나무들의 상처와 나이테에서 자신을 보고 급기야 그의 손 끝에서 푸른 잎을 싹 튀운다.

 그가 "푸른 나무의 생애가, 그가 저 하늘을 향해 닦아가던/ 가지가지마다의 반짝이던 길들이/ 한 번쯤은 보이지 않을 까"<쓰러진 나무>라고 썼듯.



 옮겨온 글//

 

David London - Memories Of Y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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