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 억
나는 국민학교 사학년부터 육학년까지 기억이 없다
사학년 다니다 부여읍에 사는 고모집에
애기 식모로 갔기 때문이다
부소산 산 그늘이 서늘하던 그 집에서
정림사지 오층 석탑이 한 눈에 보이던 그 집에서
아픈 고모 대신 새벽밥을 지으며
나보다 조금 어린 동생들을 학교에 보내며
내 초롱초롱한 꿈들을 접어야 했다
푸른 측백나무 너머로
학교가는 아이들 재잘거림
그 소리 좇아 가다 흙마당에
그림을 그리곤 했다
그때는 내 인생은 이미 없었다
그래도 좋았던 것은
오후가 되면 자전거를 타고
읍내를 한 바퀴 도는 것이었다
부소산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머리칼로 받으며
언덕에서부터 내달려 궁남지 연못을 돌아
차부를 지나 경찰서앞 로타리를 돌 때는
신이나서 엉덩이를 들썩이며 손을 놓고 달리기도 했다
분명, 그때부터 였을 것이다
혼자 노는 법과 혼자 생각하고
살아가는 법을 터득한 것이
너무 일찍 마음을 비우는 법을 배웠다
생각은 늘 마음보다 먼저 내 머리를 지배하고
고개숙여 낮추는 법을 그때 알았다
길 위에서...
비가 오는 날이었어요
길을 나섰지요
무작정 아래로 아래로 갔어요
창밖으로 푸른 기억들이 언뜻 스쳤지요
늦은 저녁 땅끝 어느 마을에 스며들어
한번도 와본 적 없는 낯선 길 위에 서 있었지요
간이역에 비는 무섭게 퍼붓고
이따금 지나는 자동차 불빛에
노란 은행잎이 흩어지는 것이 보였지요
막차를 타고 끝도 없이 달려 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누군가의 말이 생각났어요
길 위에서 또다른 길을 찾는 것
사랑이 떠나면 또다른 사랑이 오는 것
담배를 피울 줄 알았다면
아마 이쯤에서 한 대 피웠겠지요
사람으로 태어나서
사람으로 살아가는 일이나
길을 찾아 떠난 길 위에서
길이 막혀 돌아서는 일이나
다 캄캄한 일입니다
나는 누구인가
오늘 이 길 위에서 묻습니다
섬진강에서
늦은 밤 구례구역
불빛하나 내려놓은 기차는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오래 이룬 내 사랑은
나무처럼 서서 어제본 듯 웃기만 하고
외롭게 외롭게 기다린 그리움
함초롬 달빛 받아 빛나던 이마에 입맞추고
섬진강 물소리 들으며
나무 아래 앉아 술을 마셨지
우린 이 강물 첫 줄기 데미샘을 얘기했고
지리산 원추리 꽃을 얘기했지
지리산 시인과
섬진강 시인과
둘 중에 누가 더 좋으냐고 얘기했고
칡흑 같은 어둠 속에서 다리 하나가 보였지
겁도 없이 저 다리를 건너가 보자 했지
물소리는 더욱 세게 들리고
물소리에 목소리는 작게 들렸지
멀리 구례구역이 작은 불빛으로 빛나고
별 얘기도 없이
그렇게 밤이 깊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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