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좋아

시 세편...

질경이" 2006. 11. 29. 22:00

 

       

 

   기 억

 

 

나는 국민학교 사학년부터 육학년까지 기억이 없다

사학년 다니다 부여읍에 사는 고모집에

애기 식모로 갔기 때문이다

부소산 산 그늘이 서늘하던 그 집에서

정림사지 오층 석탑이 한 눈에 보이던 그 집에서

아픈 고모 대신 새벽밥을 지으며

나보다 조금 어린 동생들을 학교에 보내며

내 초롱초롱한 꿈들을 접어야 했다

 

푸른 측백나무  너머로

학교가는 아이들 재잘거림

그 소리 좇아 가다 흙마당에

그림을 그리곤 했다

그때는 내 인생은 이미 없었다

 

그래도 좋았던 것은

오후가 되면 자전거를 타고

읍내를 한 바퀴 도는 것이었다

부소산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머리칼로 받으며

언덕에서부터 내달려 궁남지 연못을 돌아

차부를 지나 경찰서앞 로타리를 돌 때는

신이나서 엉덩이를 들썩이며 손을 놓고 달리기도 했다

 

분명, 그때부터 였을 것이다

혼자 노는 법과 혼자 생각하고

살아가는 법을 터득한 것이

너무 일찍 마음을 비우는 법을 배웠다

생각은 늘 마음보다 먼저 내 머리를 지배하고

고개숙여 낮추는 법을 그때 알았다

 

 

 

 

 

      길 위에서...

 

 

 

비가 오는 날이었어요

길을 나섰지요

무작정 아래로 아래로 갔어요

창밖으로 푸른 기억들이 언뜻 스쳤지요

늦은 저녁 땅끝 어느 마을에 스며들어

한번도 와본 적 없는 낯선 길 위에 서 있었지요

 

간이역에 비는 무섭게 퍼붓고

이따금 지나는 자동차 불빛에

노란 은행잎이 흩어지는 것이 보였지요

막차를 타고 끝도 없이 달려 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누군가의 말이 생각났어요

길 위에서 또다른 길을 찾는 것

사랑이 떠나면 또다른 사랑이 오는 것

 

담배를 피울 줄 알았다면

아마 이쯤에서 한 대 피웠겠지요

사람으로 태어나서

사람으로 살아가는 일이나

길을 찾아 떠난 길 위에서

길이 막혀 돌아서는 일이나

다 캄캄한 일입니다

 

나는 누구인가

오늘 이 길 위에서 묻습니다

 

 

 

 

 

 

      섬진강에서

 

 

 

 

늦은 밤 구례구역

불빛하나 내려놓은 기차는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오래 이룬 내 사랑은

나무처럼 서서 어제본 듯 웃기만 하고

외롭게 외롭게 기다린 그리움

함초롬 달빛 받아 빛나던 이마에 입맞추고

 

섬진강 물소리 들으며

나무 아래 앉아 술을 마셨지

우린 이 강물 첫 줄기 데미샘을 얘기했고

지리산 원추리 꽃을 얘기했지

지리산 시인과

섬진강 시인과

둘 중에 누가 더 좋으냐고 얘기했고

 

칡흑 같은 어둠 속에서 다리 하나가 보였지

겁도 없이 저 다리를 건너가 보자 했지

물소리는 더욱 세게 들리고

물소리에 목소리는 작게 들렸지

멀리 구례구역이 작은 불빛으로 빛나고

별 얘기도 없이

그렇게 밤이 깊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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