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스크랩] 영화[오래된 정원]을 보고나서 <펌>

질경이" 2009. 10. 11.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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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상수 감독의 오래된 정원을 이제서야 봤다. 
텔레비전에서 방영해줄때까지 오래 오래 묵혀서 보는 습관 탓이다. 
시작은 기대에 차 있었다. 그러나 과연 나는 뭘 기대한 것일까. 386에 대한 향수? 
아니면 지나간 과거에 대한 추억? 아니면 지진희의 멋진 연기? 
아니면 생이별을 할 수 밖에 없는 그들의 애타는 사랑? 아이를 낳고 키워야 하는 미혼모의 일생? 
영화를 다 보고난 뒤의 느낌은 그랬다. 도대체 난 뭘 기대했을까? 
뭘 기대하고서 오래된 정원을 오래 오래 보고 있었을까? 
그러나 아무런 기대 없이, 아무런 정보 없이 봤다면 현우에게 몰입하여 영화를 보지 않았을 지도 모르겠다. 
만일 그랬다면 윤희가 평생을 기다리기엔 너무나도 짧았던 어떤 쾌락, 어떤 즐김에 몰입할 수 있었을 것이다. 
죽기 직전의 윤희의 고백, 그것은 사랑이었다고, 그 사랑이라는 한마디 말의 공명이 더 크게 울려 퍼졌을 지도 
모를 일이다.  
한 여자, 한 여자가 우연히 찾아온 한 남자. 친구의 친구로 이전엔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던 한 남자를 만난다. 
이런 저런 이유와 구실을 달지 않고서 여자는 남자에게 일용할 양식이 되어주었고, 바깥의 폭풍을 피해 숨을 
수 있는 한시적 집이 되었다. 
그러나 “먹여 줘, 재워 줘, 몸 줘. 니가 뭐가 부족해서 떠나니?”라는 여자의 말처럼 남자는 여자를 버리고 
권력의 심장을 찾아서 떠난다. 
물론 그가 찾아가는 곳은 권력 그 자체라기보다  그 권력이 자신을 정의하기 위해 억압해야 하는 어두운 이면이다. 
블레이크가 말했던가. 감옥의 벽돌은 법의 돌로 지어진다고. 법과 감옥과 남자는 이렇게 묘한 삼위일체를 이룬다. 
그러나 그 곳에서 남자는 권력의 핵, 그 중심부에 거주하는 암흑의 핵심을 증거 하는 쓰레기가 되고, 여자는 
여전히 세계를 바꾸기 위해 분투하는 어둠의 자식들에게 또다시 또 다시 집이자 일용할 양식이 되어주었다. 
하지만 여자는 그들의 정신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의 대화는 그녀에게 공허하다. 
이 영화에서 여자는 정신이 아니라 육체이고, 그녀가 제공하는 공간은 여자의 외화된 육체로 보인다. 
영화에서 (사회주의) 정신을 극화하는 남자는 다시 돌아오지만 여자는 세월이 흘러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그 자리에 집으로 건물로 그림으로 그대로 머물러 있다. 물론 여자는 죽었다. 
하지만 죽음이 바로 그 죽음이 여자는 집이며 공간이란 은유를 더 강화하고 있다. 
<오래된 정원>이란 영화/소설의 제목이 시사하듯이. 
그러나 오래된 정원으로서 여자의 일생은 “사랑”으로 요약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녀가 남긴 마지막 말인 듯 등장하므로. 
하지만 오래된 정원으로서가 아닌 살아있는 사람으로서 여자가 사랑한다고 말했을 때, 
여자는 먼 훗날의 어느 날 남자가 그 말을 들어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상상할 수 있었을까? 
남자는 여자를 만나기 위해 돌아와서 과거를 재구성한다. 
이제야 자신이 쓰레기라고 느끼는 남자, 현운우는 여자가 자신을 사랑했다는 것, 그리고 그 여자가 그의 자식을 
낳아서 어른이 되도록 키워주었다는 것에 안도한다. 그가 딸에게 보여준 그 따스한 미소가 표상하듯이. 
17년의 세월을 거슬러서 돌아온 남자는 이제 과거의 동지애로 뭉쳐있던 동지가 더 이상 동지가 아님을 발견한다. 
하지만 여자에게서 그는 잃어버린 과거의 의미를 찾고자 한다. 여자가 살았던 동네, 여자의 집, 여자의 작업실, 
여자의 그림, 이 모든 것은 그에게 여자를 표상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동지들과의 만남에서는 배신감과 같은 어떤 감정을 느끼지만, 여자는 다르다. 
여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그들의 언어에서 비켜서 있었기 때문에 어쩌면 배신감이란 단어가 어울리지 않아서
이기도 하지만 그녀가 더 이상 살아있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어쨌든 그는 여자를 통해 자신의 과거를 의미 있는 것으로 자신의 삶을 살만한 것으로 재구성한다. 
그는 딸을 낳아준 여자에게 감사하고 17년의 세월에도 자신을 기억해준 여자에게 감사의 미소를 던진다. 
이 과정에서 여자는 <오래된 정원>이 된다. 
여자의 사랑한다는 바로 그 말조차도 남자에 의해 가부장적인 언어가 덧씌워진다.  
윤희가 아무리 많은 영화의 장면을 채운다 해도 영화의 관점은 현우의 것이다. 
그래서 영화 전체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현우의 관점이고, 현우의 판타지, 곧 남자의 판타지다. 
사실 감독 역시 이 영화에서 표면을 매끄럽게 잘 가다듬은 이러한 남자의 판타지를 보여주고 싶었는지도 
모르겟다. 
그러나 때때로 영화는 감독이나 배우 혹은 작가가 생각하지 못한 잉여를 남긴다. 
여자가 사랑한다고 말할 때 여자에겐 청자가 없다. 이것은 매끈하게 구성된 영화의 판타지를 횡단하는 일종의 
잉여인지도 모른다. 
여자는 현우를 보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카메라를 보고 말한다. 사랑했노라고, 사랑하노라고, 사랑이었다고, 
사랑이라고. (시제가 현재인지, 과거인지, 진행형인지, 정확하게 기억이 나질 않는다.)  
말하는 것이 아니라 쓴다는 표현이 더 적절한 지도 모르겠다. 
여자에게 무엇이 사랑일까? 
사회주의가 여자에게 아무런 무게를 부여하지 못했던 것처럼  여자가 사랑이라고 명명한 그것 역시 그렇게 가벼워 
보였다. 첫 만남이 그랬고 첫 키스가 그랬고 첫 잠자리가 그랬다. 
여자에게 시제가 중요한 것이 아니듯이 처음이라는 것 역시 특별한 의미를 띠는 것은 아니다. 
처음과 중간과 끝을 만들고자 하는 욕망은 여자에게 없다. 
여자가 남자에게 충실했던 것은 결과적으로 사후에 구성해보니 그렇다는 것이다. 
충실하고자 해서 충실했던 것이 아니라 지나고 보니 충실한 것으로 재구성이 될 수 있더라는 말이다. 
하지만 우리가 현우의 관점에서 사랑의 의미를 재구성하지 않는다면, 한 남자에 대한 사랑으로 들쭉날쭉한 의미의 
지층들을 매끄럽게 손보지 않는다면, 어쩌면 여자는 제도에 얽매이지 않고 살 수 있었던, 
언제나 어긋나고 삐걱거렸던 그래서 더할 나위 없이 자유로왔던 여자의 자유를 사랑이라는 이름을 빌어 표현한 것
일 지도 모를 일이다. 여자는 오래도록 그렇게 가지 치지 않고 가다듬지 않고, 남자의 시선 앞에서만 아름다운 그런 
정원으로 한계지어지지 않아서... 그래서 어쩌면 그렇게 자유로왔노라고 말하고 싶었는 지도, 우리와 현우의 눈엔 
기나긴 기다림으로 보였던 그것이 여자에겐 고통이 아니라 즐김이었다고.... 그렇게 말하고 싶었는 지도 모른다. 
그리고 또 어쩌면 17년이 지나서 이제는 쓰레기로 밖에 자신을 생각할 수밖에 없을 남자에게, 
그는 원래부터 쓰레기였다고 말해주고 싶었는 지도 모르고, 그러나 언제나 기껍게 쓰레기통이 되어준 여자 자신의 
삶은 그렇게 슬프지 않은 것이었다고. 
그 쓰레기들을 사랑하며 살 수 있었던 것은 여자의 삶이 한계를 넘어, 법을 넘어 자유의 영역에 근접해 있었기 때문
이라고... 그렇게 말하고 싶었는 지도 모른다.   
 <퍼온 글>
출처 : 빛고을 광주의 이미지
글쓴이 : 조훈생각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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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영화를 오래 전에 단성사에서 혼자 봤다.

왜 혼자 봤는지는 생각나지 않지만

아마 황석영의 소설 때문이었는지도.

어떤 아픔 때문에 그것을 치유하기 위함이었는지도...

주인공 오현우의 고뇌와 우수어린 눈빛,

윤희역의 염정아의 강렬함이 생각나고, 

지진희의 연기가 돋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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