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좋아

즐기는 세상......오도엽

질경이" 2006. 7. 2. 21:19

 

 즐기는 세상

 

                      오 도 엽

 

아직도 이런  시를 쓰나요

이제는 컴퓨터랑 씹하는 시를 써야 해요

허망한 듯 한숨짓고         

혼돈스러운 듯 머리 쥐어뜯으며

처녀 속살 보듯 옛일 벗기며

하지만 손길 머물러서는 안 돼요

한때는 양심적이었으나

한때는 양심 나부랭이 같은 것은 뭉갠 채

달라진 듯한 세상에 맞추어

휩쓸려 따라 하면 돼요

하지만 주의할 것은

지금도 길을 찾아 고민한 듯 보이게

 

아직도 이런 시를 긁적이나요

통일이니 민주니 노동이니 하는

고리타분하고 돈 안 되는

그냥 세상과 씹하는 시를 써요

어차피 즐기는 건데

좋잖아요

 

 

 

 

 

 

봉암에 가면

 

 

봉암 공단에 가면

한쪽 팔 잘린 김씨 있다

 

보루꾸에 슬레이트 지붕 이어

여름이면 푹푹 찌고

겨울이면 발발 떠는

덕지덕지 마찌꼬바 천국

봉암공단에 가면

외팔이 김씨 만날 수 있다

 

점심때면

사시사철 걸치고 사는

때 절은 까만 코트 주머니에서

소주병 꺼내 입으로 따고

용하게 카스텔라 봉지 한 손으로 뜯어

꾸역꾸역 빵 쑤셔넣고

꼴깍꼴깍 소주 반 병

카이

하늘 쳐다보는 김씨

 

남은 소주 신문지로 구멍 막아

닳아 반지르르한 코트 안주머니에 담고

공단 거리 헤맨다

 

마찌꼬바 인생 삼십 년

늘품 없어 그 흔한

공장장 반장 자리 하나 차지 못했지만

못 만드는 것 없다는 봉암에서 굴러

잘나가는 선반쟁이였는데

삼 년 전

선반에 손 말려 잘둑

엎친 데 덮쳐

부도 낸 사장 꼭꼭 숨고

산재는커녕 의료보험도 없는 공장이라

보상은 물론 치료는 제대로 못 받고

그나마 마찌꼬바 인생도

마감한 김씨

 

걷기도 지쳤는지

담벼락 한 귀퉁이에 주저앉아

남은 소주 꺼내

닫힌 신문지 입으로 뽑아

마저 단숨에

카이

하는 쳐다보는 김씨

 

무엇이 아쉬워

오늘도 봉암공단 떠나지 못하는가

 

 

 

 

 

오도엽 시집<그리고 여섯 해 지나 만나다>중..실천문학의 시집1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