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기는 세상
오 도 엽
아직도 이런 시를 쓰나요
이제는 컴퓨터랑 씹하는 시를 써야 해요
허망한 듯 한숨짓고
혼돈스러운 듯 머리 쥐어뜯으며
처녀 속살 보듯 옛일 벗기며
하지만 손길 머물러서는 안 돼요
한때는 양심적이었으나
한때는 양심 나부랭이 같은 것은 뭉갠 채
달라진 듯한 세상에 맞추어
휩쓸려 따라 하면 돼요
하지만 주의할 것은
지금도 길을 찾아 고민한 듯 보이게
아직도 이런 시를 긁적이나요
통일이니 민주니 노동이니 하는
고리타분하고 돈 안 되는
그냥 세상과 씹하는 시를 써요
어차피 즐기는 건데
좋잖아요
봉암에 가면
봉암 공단에 가면
한쪽 팔 잘린 김씨 있다
보루꾸에 슬레이트 지붕 이어
여름이면 푹푹 찌고
겨울이면 발발 떠는
덕지덕지 마찌꼬바 천국
봉암공단에 가면
외팔이 김씨 만날 수 있다
점심때면
사시사철 걸치고 사는
때 절은 까만 코트 주머니에서
소주병 꺼내 입으로 따고
용하게 카스텔라 봉지 한 손으로 뜯어
꾸역꾸역 빵 쑤셔넣고
꼴깍꼴깍 소주 반 병
카이
하늘 쳐다보는 김씨
남은 소주 신문지로 구멍 막아
닳아 반지르르한 코트 안주머니에 담고
또
공단 거리 헤맨다
마찌꼬바 인생 삼십 년
늘품 없어 그 흔한
공장장 반장 자리 하나 차지 못했지만
못 만드는 것 없다는 봉암에서 굴러
잘나가는 선반쟁이였는데
삼 년 전
선반에 손 말려 잘둑
엎친 데 덮쳐
부도 낸 사장 꼭꼭 숨고
산재는커녕 의료보험도 없는 공장이라
보상은 물론 치료는 제대로 못 받고
그나마 마찌꼬바 인생도
마감한 김씨
걷기도 지쳤는지
담벼락 한 귀퉁이에 주저앉아
남은 소주 꺼내
닫힌 신문지 입으로 뽑아
마저 단숨에
카이
하는 쳐다보는 김씨
무엇이 아쉬워
오늘도 봉암공단 떠나지 못하는가
오도엽 시집<그리고 여섯 해 지나 만나다>중..실천문학의 시집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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