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문

[스크랩] 저물어 가는 봄날, 홀로 길을 떠나다.

질경이" 2008. 10. 26. 22:11
    저물어 가는 봄 날, 홀로 길을 떠나다
봄날이 저문다. 여름으로 가는 나른한 토요일 오후. 새롭게 단장한 용산역 플랫홈은 지붕 유리에 반사되는 빛으로 투명하다. 많은 여행객들 사이 광장 한 복판에 서 있는 나는 비로소 자유를 느낀다. 오래 만에 혼자 떠나는 여행이 주는 신선함과 고독으로 가슴이 벅차다. 가끔씩 떠나던 여행도 경기침체로 접어둔 지 오래고 보면 나날 이 불안해지는 미래와 비루한 내 삶을 오늘만큼은 잊고 싶다. 결혼한지 20년. 어떠한 기념일에 특별히 마음둔 적 없지만 남편과 나는 각자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뭐, 조금 특별하게 보내기로 한 것이다. 남편은 좋아하는 친구를 만나러 제주도로 날아가고, 나는 내가 좋아하는 지리산과 시인들을 만나러 남도 땅으로 간다. 미리 기차 예매를 안한 터라 좌석이 없어 전라도선 입석을 탔다. 다섯 시간을 서서가야 하지만 하나도 지루하거나 외롭지 않다. 이것 또한 재미이고 보면 나도 별종은 별종인 모양이다. 도시를 벗어난 기차 는 들길을 달리고 아카시 향이 그윽한 숲을 달린다. 나만 서서 가면 어쩌나 내심 걱정했는데 앉아 가 는 사람만큼이나 서 있는 사람도 많다. 아직도 입석 타고 다니는 사람이 많다는 것을 보고 놀랐다. 눈에 띄게 예쁜 아가씨 곁에 섰다. 평택을 지나 신탄진 역을 조금 지나자 어디에 그 불온함이 숨어 있었을까. 기차 칸막이 계단에 앉아 가자는 아가씨 말에 이동하려는데 객차를 연결하는 고리에서 이상한 소리가 났다. 호기심 많은 나는 들여다 보다 경악을 했다. 연결고리가 불꽃을 일으키며 서서히 빠지고 있는 것 이다. 당황한 나는 아가씨 손을 잡고 가방을 들었다. 뒷 칸으로 간 우리는 어떻게 이 사실을 승무원 에게 알려야 할지 몰라 사람들에게 "열차가 끊어진다. 사고가 난 것 같다" 고 말했지만 모두가 무심한 얼굴로 바라만 볼 뿐이다.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커다란 굉음과 함께 불꽃이 치솟았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모두 엎드렸다. 앞 칸은 이미 시야에서 멀어지고, 뒷 칸은 괘선을 이탈한 채 비스듬히 멈춰섰다. 정말 어이없는 사고였다. 사색이 된 승무원이 달려오고 앞 칸이 다시 돌아와 연결 했다. 엄청난 사고였지만 다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1시간이 연착되었고, 다른 차로 갈아탔다. 아무도 항의 하거나, 환불을 요구하는 사람은 없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누가 전라도 사람들을 나쁘다고 했던가" 이렇게 착하고 순박한 얼굴들을 본 적이 없다.(그것도 무더기로) 그렇게 어둠은 강을 감싼 채 불온한 저녁은 깊어 갔으므로 압록을 지날 때는 그 아름다움은 만날 수 없었다. 6시간만에 구례구역에 도착했다. 그때까지도 불안했던 마음은 마중 나온 친구를 보자 다 사라져 버렸다. 어느새 그리웠던 악양 무딤이들에 마을의 불빛이 내려와 앉았다. 이원규 시인의 출판기념회와 음악회가 열리는 매암차박물관에 도착했지만 행사가 거의 끝나가고 있다. 문수골 깊은 골짜기, 외딴집 시인의 집에서 하루 밤 묵었다. 밤새 취할 것 같았던 여흥도 잦아드니 숲도 잠이 들고 하늘에 별이 촘촘하다. 시인이 말하기를 섬진강의 봄은 남해에서부터 타고 오르며 악양 들판에 머물다 휘돌아 적신다고 한다. 화개와 구례, 남원으로 북상하여 비로소 지리산 아랫도리 에 불을 지핀다고 했다. 아침에 악양 지리산 자락에 사는 박남준 시인의 집으로 가 시인이 해주는 밥을 먹었다. 천연 재료만 쓰는 콩나물 해장국, 직접 담근 김치와 고추절임, 그의 음식 솜씨가 일품이다. 그의 집 뒤안과 마당에는 질경이가 쫙 깔려 있다. 작은 둥벙을 직접 손질하는 손이 바쁘다. 내일이면 다 시 탁발순례를 떠나야 하기 때문에 이곳 저곳 손 볼 곳이 많단다. 기념으로 그의 토방에서 사진을 찍었다. 뒤안에 매실나무 한 그루, 다닥다닥 열려 있던 매실을 나보고 다 따가라고 하는 것을 보니 집을 장기간 비우기 때문에 미처 손 길이 미치지 못하는 탓인가 보다. 뒷산으로 이어지는 작은 길에는 머위나물 우북한 줄기와 잎을 따서 가져왔다. 서울로 올라오는 길에 전주에 들렸다. 아, 전주천. 노란 꽃창포가 자연스러운 물가에 보라색 꽃이 군락을 이루며 피어 있다. 무슨 꽃이냐고 물어보니 "등갈퀴덩굴꽃"이라고 했다. 거기서 풍물패를 만났다. 박남준 시인의 꽹과리와 장구치는 모습을 보니 그 모습이 흡사 춤꾼 같다. 끊어질듯 하다 이어지고, 사위어질 듯 하다 살아나는 모습에 넋을 잃었다. 문득, 그의 등뒤로 저물어 가는 봄날을 본다. 걸어서 누군가에게 간다는 것 그리운 누군가가 있다는 것 그리움의 장소가 있다는 것, 참 좋은 일이다.
    글/ 질경이, 신경숙 음악/ Gigmund groven- Lost Sheep
출처 : 섬진강 편지
글쓴이 : 질경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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