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추억을 끌어 옵니다>2004년 1월 25일 구정연휴
다산 생가 가는 길
처음부터 다산생가에 가려고 집을 나선 것은 아니었습니다.
구정 연휴라서 5일간의 여유도 있었지만, 엊그제부터 강원도에 다녀오자는 남편 말을 믿고 있었는데
어머님 모시고 도선사에 다녀오니 남편은 친구들과 강원도로 떠나 버렸습니다.
갑자기 배신감과 공허함이 밀려옵니다.
그래서 한 여자를 꼬드겨 아침 일찍 청량리에서 버스를 타고 어딘가로 무작정 떠나보자 했지요.
우리가 탄 버스는 양수리 행이었습니다.
'그래, 물빛 고운 강변을 걸어보자.
그도 아니면 낯선 정거장에 내려서 시골길을 걸어보자'하고 떠난 길입니다.
대 여섯명 밖에 타지 않은 버스는 어느 새 경기도로 접어들고 소풍가는 아이처럼 가슴이 뜁니다.
덜컹거리는 버스를 타고 한적한 시골길을 달려 본지가 언제인지요.
새록새록 기분이 좋아져서 어린아이처럼 깔깔거렸습니다.
겨울 숲
구정 연휴였지.
청량리에서 버스를 탔어 무작정.
양수리 어디쯤 달리다가
정류장도 아닌 곳에서 공처럼 튕기듯 내렸지
꽁무니를 보이며 버스는 멀어지고
솔잎 쌓인 숲이 좋았어
바람이 불어 잔설이 쓸쓸하게 날렸지
이정표를 보니 다산생가 2km
화살표의 궤적을 따라
눈길을 걸으며 휘파람을 불었지
발에 톡톡 행복이 채였어
미끄럼을 타고 하늘을 날았지
눈을 던지고 쓸쓸한 단상을 던졌지
키 큰 미루나무를 올려다 보듯
너를 올려다 보기를 좋아했어
그때가 생각이 나서
하루종일 머리속을 헤집었어
그 강가 그 숲에
다시 두고 올 작정이야
내 마음을.
버스는 강을 끼고 달립니다.
차창 밖으로 봄을 준비하고 있는 겨울 나무들이 스칩니다.
아직도 잔설이 희끗희끗한 겨울 강가의 풍광이 너무 좋아서 몇 번을 내릴까 하다가 말았습니다.
그러다 다산공원이라는 안내방송이 나오자 우리는 공이 튀어 오르듯 벌떡 일어나 차를 세웠습니다.
나이를 잊고 세월을 잊은 자유의 날입니다.
무작정 내리고 보니 우리는 겨울 숲의 한 가운데 있었습니다.
이정표를 보니 '다산생가 2km'라고 써 있습니다.
사람하나 다니지 않는 길에 가끔씩 자동차가 지나갑니다.
재를 하나 넘어 가는데 봄날 같은 햇빛은 금방이라도 논두렁에 아지랑이를 피워 올릴 것만 같습니다.
잔설을 밟으며, 휘파람을 불다가 눈싸움을 합니다. 호젓한 오리나무 숲을 지나 다산생가에 섰습니다.
그 이름만으로도 설레이는 다산 정약용,
정약용은 1762년 양수리의 마재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생가 앞에는 학문에 능하고 과학에도 능했던
그의 발명품들이 전시돼 있습니다. 건축기구 등이 있는데 제가 알아 볼 수 있는 것은 거중기뿐입니다.
생가 여유당(與猶堂)은 "겨울에 시내를 건너듯 망설이고 또 망설이며,
사방 이웃들의 시선을 꺼리듯 겁을 내며", '삼가고 또 삼가면서',만사에 조심하며 살겠다는 뜻이 담겨 있는데
집 이름에서 그의 고단하고 힘들었던 생애가 묻어납니다.
18년간의 유배생활에서 그는 보석같은 저서 <목민심서>,<경세유표>,<흠흠신서>등을 썼습니다.
나라와 백성을 생각하는 학자이기도 했지만 1000편이 넘는 시문집 <여유당 전서>를 남긴 시인이기도 합니다.
1. 홀곡행, 수안 태수에게 올리다 〔笏谷行 呈遂安守〕
彦眞山高笏谷深 언진산 산이 높고 홀곡은 골이 깊어
山根谷隧皆黃金 산이고 골짝이고 속은 다 황금이라네
淘沙 水星采現 모래와 물 거르면 별들이 빛나듯이
瓜子 粒紛昭森 무수한 사금들이 반짝반짝 나타나지
利竇一鑿混沌瘠 돈구멍만 파고 보면 하늘 땅도 야위어지고
快斧爭飛巨靈劈 잘 든 도끼질 자주하면 산신령도 쪼개지는 법
下達黃泉上徹 아래로 황천까지 위로는 하늘까지
洞穴 絶地 구멍이 펑펑 뚫려 지맥이 끊어지네
筋膚齧蝕交 살과 힘줄 다 찢기듯 골짝은 텅텅 비고
觸?脊森 해골 등뼈 앙상하듯 나뭇가지 비뚤어지며
山精 著樹 산의 정령 울어대며 나무 끝으로 오르고
鬼魅晝騁多啼鴉 낮도깨비 날뛰고 까마귀떼 까옥대네
椎埋竊發蔚雲集 사람백장 들고 일어나 구름처럼 모여들어
藏命匿姦潛引汲 못된 것들 끌어들여 남몰래 숨겨 두고는
穿 鑿 八九千 팔천 개 구천 개나 구덩이를 파고서
蜂屯蟻聚成遂邑 개미와 벌떼 한 고을을 이루었지
歌管嘲轟弄淸宵 밤이면 떠들면서 노래하고 피리 불고
酒肉芬芳宴花朝 꽃피는 아침이면 술 고기로 잔치하며
名娼妙妓日走萃 날마다 명기명창 그리로 모여드니
西關郡縣色蕭條 관서지방 고을들 몰골이 쓸쓸하다
農家募雇無人應 농가에는 품팔이 갈 사람이 없어서
日傭百錢猶不肯 돈 백냥을 준다 해도 오지 않을 것이므로
村閭破析田疇蕪 마을은 다 깨지고 전답은 모두 묵어
蒿萊? 成荒 쑥대밭 자갈밭이 되고야 말 것이네
山澤之利本宜 산택의 생산물은 나라에서 관리해야지
豈令狡獪恣所專 교활한 자 손아귀에 맡겨서야 될 것인가
太守新來民拭目 새로 온 태수에게 백성들 기대 크니
煩公夷坎塞 催 田 공이여 금구덩이 다 메우고 밭갈이나 독촉하구려
솔직히 생가답사는 재미없었습니다.
반듯하고 화려하게 인위적으로 지어놓은 다산기념관, 살아 생전 유배지에서 오랜 세월을 지낸
다산의 삶과는 판이하게 다른 기념관이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의 생가만은 조촐하리만치 정갈해 보였습니다.
북한강을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곳에 자리잡은 그의 묘소에 묵념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잔디보호를 명목 삼아 들어가지도 못하게 줄이 쳐져 있습니다.
거기서 멀지 않은 강가로 갔습니다.
강가에 배 두 척이 그림같이 매어져 있었습니다.
조심스럽게 살얼음을 밟고 배에 올라갔더니
같이 간 사람이 위험하다고 나오라고 성화를 부립니다.
강 너머로 아득히 드리운 산과 마을이 정겹습니다.
모처럼 휴식 같은 친구와 한껏 여유를 부렸습니다.
그 옛날 정약용이 이 강가에서 물수제비를 뜨며 놀았겠지요.
강이 참 아름답습니다.
돌아오는 내내 행복했습니다.
2004.1.25 양수리에서 질경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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