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문

아버지의 수첩

질경이" 2006. 1. 11. 23:22

 

아버지의 수첩

 

 

 

 

 

파란 보리가 고개를 내밀고 올라오는 계절이면 아버지를 떠올린다. 그리고 아버지의 손 때묻은
작은 수첩도 같이 떠올린다. 어려서 본 아버지는 늘 푸른 보리 같았다.
조용한 성품과 낙천적인 성격으로 우리에게 넉넉한 기쁨과 자유를 주셨던 아버지의 청춘은 푸른
보리처럼 펄럭였고, 넓은 그늘을 만들어내는 느티나무 같았다.
지금도 농사를 지으시는 아버지는 농촌에서 나서 농사만 지으며 사셨다. 농사꾼 답지 않게
늘 책을 가까히 하셨다. 저녁이면 작은 수첩에 무언가를 적곤 하셨는데 그런 아버지의 모습이
보기 좋았다. 다른 아버지들 하고 다르다는 생각에 퍽이나 우쭐했던 기억이 난다.
필체 또한 좋으셨던 아버지는 동네에서 몇몇 안되는 지식층에 들곤 했다.

 

 

 


내 나이 사십이 넘어서야 아버지가 젊어서 부터 일기를 쓰셨다는 사실을 알았다.
아버지는 몇 권의 수첩을 내게 보여 주셨다.
그 일기는 우리 가족사이기도 하고 농사일기 이기도 하다. 메모형식으로 짧게 쓰신 글 속에는
당신의 고뇌와 사유가 녹아 있고, 농사짓는 수고로움이 못물 넘치듯 자연의 사계절이 넘쳐났다.
우리가 태어나기 전 일과 우리가 알지도 못하는 일들이 매우 흥미롭게 전개되고 젊은 아버지와
어머니, 어린 오빠와 우리들이 숨은 그림처럼 꼭꼭 숨어 있다.
당신의 결혼이야기는 물론이고 엄마를 만난 이야기, 군복무시절 중대장 이름, 소학교 담임 선생
님 이름까지 사소한 일부터 생사가 오가는 큰 일까지 우리가 까맣게 잊고 지내던 일들이 깨알
같이 적혀 있다. 유난히 개구졌던 오빠와 나는 오래된 감나무 위에 아슬아슬하게 올라가 앉아
어머니를 애태우게 했던 일을 떠오르게 하기도 했다.

한번은 오빠가 아침부터 보이지 않아 산으로 들로 찾아 다닌 적이 있었다. 저녁때가 되어서야
골방에서 울고 있는 오빠를 발견했는데 호박밭에 들어 갔다가 뱀에게 물려 다리가 퉁퉁 부은채
울고 있었다. 그때 이야기를 아버지는 이렇게 적어 놓았다.

"장남이 뱀에게 물렸다. 독사가 아니고 구렁이라서 다행이다. 아들을 자전거에 실고 어두어진
길을 달렸다. 읍내로 달려가는 나는 어떻게 페달을 밟았는지 모른다. 등에서 땀이 비오는듯
했다. 그래도 아들은 잘 참아 주었다. 다행히 다리를 절단하는 일은 생기지 않았다. 한달을
그렇게 아들을 실고 읍내를 오갔다. 돌아오는 들길에는 늘 개망초가 흔들렸다."

 

 

십년 넘게 마을 이장을 하면서 빚만 잔득 지고 있던 아버지는 어린 우리들을 어머니에게 맡긴채
서울로 무작정 상경한 대목에서는 눈시울이 뜨거워져 그만 울어 버렸다.
그때가 사십이 채 안된 나이였다고 한다.

"함박눈이 펄펄 내리는 한산 장날, 서울에서 세공업을 하는 고향 후배와 술한잔 걸치고 나는
아내에게 한마디 말도 없이 서울로 가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하염없이 내리는 눈을 보니
내 마음이 슬퍼져 나는 울었다."

지금도 아버지는 엄마를 자전거에 태우고 논에서 돌아오시곤 하는데 엄마가 너무 가벼워 혹시 떨어졌나 하고 자꾸 뒤돌아 보신다고 했다.
나는 자연을 좋아하고 농촌을 사랑하는 이유가 아버지의 영향이고 문학을 사랑하는 이유도
아버지의 감성을 닮아서 라고 생각한다. 그런 아버지가 멀지 않은 곳에 큰 나무로 계셔서 얼마
나 좋은지. 머지않아 팔십을 바라보시는 연세에도 불구하고 세대차이가 나지 않는 것은 아직도
소년같은 순수함 때문이리라.
바람과 햇빛과 땀으로 주름진 미소만 가득한 모습이지만 오늘도 푸른 사유를 가슴 가득 품고
들길을 걸어 천천히 돌아 오시는 아버지를 생각한다.

 

글 / 신경숙 - <백미 문학 제 10호>

음악 / 그대 그리고 나 - 나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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