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과 휴일에도 일해야 하는 나 - 가족들, 시어머니, 다 잊고 꼭 같이 가고 싶은 마음 맞는 벗들과
꼭 한 번은 해보고 싶던 여행,
깊은 밤 지리산 품에 안기고 싶어서였다.
새벽, 인적마저 끊긴 남원터미널.
어둠을 뚫고 남쪽에서 달려온 우리의 수호신 꽃시인 김해화형. 그의 오래 된 봉고차는 덜컹덜컹 뻐구기 소리를 날리며
어둠을 가르며 어디론가 마구마구 달렸다.
남원 사는 지리산 지킴이 以後님의 배려와 사랑으로 우리는 잠시나마 아늑한 황토방에 짐을 풀 수 있었다.
그러나 새벽이 밝아오는데도 깊은 잠 속에는 차마 들지 못한다.... 이 시간에 그립고도 그리운 지리산 아래 누워있을 수 있다니...
뒤척이다 일어나 새벽 안개가 걷히고 있는 계곡을 따라 올라간다. 혹, 노랑 망태버섯이 있을까 숲을 뒤졌다.
새 소리를 듣고, 묵은 흙 냄새를 맡으며 버섯이 자라기 좋은 환경이구나 오랫만의 서로의 근황을 나누다가 길을 잘못 들고 말았다.
길을 잘못 들면 또 어떤가. 잘 못 든대로 거기 맑은 빛의 원추리가, 참나리가, 칡꽃이 드문두문 피어있었다.
건너편에 길이 있다는 해화형의 안내대로 계곡을 건너다가 그만 풍덩 빠지고 말았다.
눈에 보기보다는 쉽지 않아서였는데 그리던 지리산에 들었으니 꽃시인 해화형은 산신령께 온 몸을 던진거라고도 위로하고,
또 롱다리 친구는 다리가 짧아서라고 놀려댔지만 나는 맑은 꽃빛 원추리에 흑심을 품은 죄 * 라고 생각했다.
이원규 시인은 맑은 이슬의 눈으로 오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의 말대로 맑은 이슬의 눈이었어야 했는데...
그렇게 계곡 물에 몸 바친 댓가로 비탈길에 몸을 세우자 마자 너무도 보고싶던 타래난초가 피어있었다. 그것도 바위 틈에..
이 곳에서 너를 만나다니... 조금 전에 만난 노랑 물봉선보다 더 반갑구나
또 꽃을 키우며 사는 순천의 <꽃뜨락>의 주인을 시암재에서 만나기로 한 우리는 오손도손 도란도란
평일이라서 그런지 지나는 사람도 없는 정령치 길을 오르고 있었다.
인적이 뜸해서였는지 맷돼지 새끼 두 마리 숲에서 내려와 우리와 마주치자 이러저리 뛰며 길을 건너지 못하는
모습이 귀엽기도 하다. 하지만 달리는 차에 행여라도 다칠까 걱정이 모두들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다.
노고단 산정에 오르는 길 , 지리산에만 핀다는 지리털리풀이 지천-천지삐깔이다.
꽃색이 환상적인 모싯대, 빌로드 감촉 같은 노각나무꽃, 원추리, 일월 비비추, 돌양지꽃, 노루오줌, 뱀무 등등
내가 이름도 다 열거할 수 없는 우리 꽃.꽃 천지.
저 멀리 노고단이 눈에 보인다. 깨끗한 초원으로 난 나무 계단은 마치 천국으로 오르는 길 같다.
작은 나무 잎사귀 위에 누룩뱀 한 마리가 또아리를 틀고 햇빛이 그리웠던지 유유자적 몸을 말리고 있는 것을 본다.
참, 오랜만에 지리산에 오니 별의별 것을 다 본다. 나는 이상하게 산에 오면 꼭 뱀을 만나는데 징그럽다거나 두렵지 않은 것은
아마도 자연의 일부를 긍정하는 까닭이 아닐까한다.
노고단 꼭대기 돌탑 아래서 먼 능선을 보며 내 그리운 것들을 생각했다. 먼 골짜기는 운무에 쌓였고 하늘은 파랗고 가깝다.
내친 김에 여수에서 열린다는 '여수 해고 노동자 투쟁 문화제' 까지 참석했다. 여수 GS칼텍스 공장 정문에서 부당해고 복직을
요구하는 집회장에 가서 송경동 시인과 문동만, 박영희 시인을 만났다. 그들의 시와 낭송은 가슴을 뜨겁게 했다.
마지막 해화형의 시낭송은 단연 압권이었다. 많은 젊은 노동자들의 가슴에 깊이 새겨진 이 시가
행사 시작하기 한 시간 전에 쓰여졌다면 믿겠는가. 시 낭송을 들으며 김해화형은 천상 시인이다.
그렇게 하루가 갔고, 밤은 깊어져 뒷풀이 가자는 시인들을 뒤로 하고 다시 심야 버스에 몸을 실었다.
우리가 살면서 언제 또 이런 무모한 여행을 할 수 있겠는가. 밤차의 고단함이 몸을 자꾸만 가라앉게 만든다.
이제 하루가 다르게 나이 먹음을 느낀다.
멀미에 지친 몸을 노숙자처럼 남원 터미널에서 거리에 누워 본 기억도 잊지 못할 것이다.
아, 지리산이여......
지리산 편지
비껴간 새벽 초승달 처럼
지리산에 왔습니다
비 그친 뒤 사뭇 바람이 다릅니다
천국의 계단을 오르듯
노고단 나무계단을
하나씩 밟으며 천천히 오릅니다
저 돌탑까지 오르면
그대
하얀이를 드러내며 웃고 있을 것 같아
가슴이 뛰고 숨이 찹니다
꽃은 또 왜이리 많이 피었는지
천지간에 꽃인데
꽃보다 그리운 당신은
원추리 일월비비추 동자꽃 지리털리풀 구슬붕이
꽃으로 피어납니다
그대를 보듯 꽃을 보고
꽃을 보듯 그대를 떠 올립니다
초록뿐인 노고단 언덕에서
신이 빚어 놓은 푸른 성에서
감히 당신을 생각합니다.
그럼 안녕.
이원규 시 - 행여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안치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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