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후감

헤세의 정원에서 놀다.

질경이" 2009. 11. 25. 22:34

  

 헤르만 헤세의 <정원 일의 즐거움>을 다시 읽었다.

2002년 1월 6일. 내가 무척이나 아끼고 사랑했던 아이, 문학의 스승이었고, 동지였던

그녀가 내게 준 책이다.

책장을 넘기면 포도밭을 배경으로 노년의 헤세가 사색에 잠겨 앉아 있다.

자연과 잘 어울리는 모습이다.

 

 

 

 

 

 

포도나무 잎에 아롱져 내리는 햇살 한줌이 간절하게 아름답다.

이슬방울 반짝이는 오래된 정원을 읽으며 나는 잊혀진 고향을 못견디게 그리워 했다.

나는 초등학교 4학년때 떠나온 고향을 한번도 잊은 적이 없다. 행여 잊혀질까

두려워 방학이면 내려가 마을과 학굣길, 뒷산 솔숲 등을 마음에 꼭꼭 담아 오기도 했다.

향수병으로 시골 논이나 밭을 보기만 해도 숨이 막히고 가슴이 뛰던 때가 있었다.

흙냄새 풀냄새에도 두 눈을 반짝였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심어논 탱자나무가 얼마나 좋았으면

하루종일 햇볕을 쬐며 탱자나무 아래 앉아 있었다.

참새떼는 탱자 가시를 잘도 피해 날아 다녔다. 그것이 신기했었다.

 

 

 

 

 

 

집에서 마을로 내려가는 언덕에는 오래된 감나무 다섯그루가 있었다.

굵은 뿌리를 밖으로 드러낸 감나무는 우리들의 놀이터였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나무가 감나무다.

바람부는 날에는 언덕에 서서 마을을 내려다 보며 저녁짓는 밥 냄새와 연기를 맡곤 했다.

 

헤세는 이 땅위의 모든 사물이 질서정연하게 순환하는 단순하고 명징한 것들에 대해

사람만이 이 순환에서 제외된 것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아주 이따금, 씨앗을 뿌리고 수확하는 어느 한순간 

 땅위의 모든 피조물 가운데 유독

 우리 인간만이 이같은 사물의 순환에서

 제외되어야 한다는 것이 얼마나 이상한 일인가 하는 생각이 떠오른다.

 사물의 불면성에 만족하지 못하고,

 한번뿐인 인생인양 자기만의

 별나고 특별한 것을 소유하려는 인간의 의지가 기이하게만 여겨지는 것이다....."

 

 

 

 

 

 

 

 

어려서 부터 자연을 관찰하고 사랑하는데 탁월함을 발휘했던 시인은 또 이런 글을

남겼다.

 

 

"......돌 틈에 솟아난 색색의 줄기,

 물 위에 떠다니는 기름 얼룩, 유리잔에 간 금ㅡ

 그런 모든 것들이 이따금 마치 마법처럼 내 마음을 깊이 흔들었다.

 물과 불, 연기, 그름, 먼지 그리고 특히 눈감으면 보이는 선회하는 빛의 무리...."

 

 

 

 

 

 

나는 20년이 지난 후로도 고향을 그리워하며 한 여름이면 부여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차부에 내리면 주름진 얼글의 정겨운 사람들이 쏟아지는 햇빛 속으로 들어왔다.

느린 말투에 에돌려 말하는 반어법 사투리가 좋아서 한참을 듣는다.

다시 마을로 향하는 버스에 오르면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어디까지 가냐며 마치 딸이나

손녀를 대하듯 의심없는 눈빛이 다정하다.

 

십리길을 걸어 들어가야 하는 신작로길, 소설 속의 '삼포가는 길' 같다.

높은 미루나무에서 울리는 매미소리가 아스라히 들리고 미루나무를 올려다 보며

나는 정지된 화면처럼 서 있곤 했다.

그 순간 고향에 대한 연민으로 가슴 한켠이 무너지다가도  다시 바람처럼

안겨오곤 했다.

그렇게 많은 날들을 그리움으로 벌처럼 웅웅거리며 살았다.

 

나는 헤세의 삶을 사랑한다.

헤세처럼 살다가 가고 싶다.

냄새나는 두엄을 만지고, 포도나무를 붙잡아 매며

행복해 하는 헤세의 얼글을 들여다 본다.

둥근 리켈테 안경 너머로 반짝이는 노시인의 행복한 얼굴을 본다.

 

 

 

 

 

꽃을 가꾸고 작물을 키우는 것도 흙에 대한 애정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다.

모든 농부들의 마음속에는 자연을 경외하는 마음과 사랑이 넘쳐나기 때문이다.

이 땅의 모든 흙과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존경을 보낸다.

시간이 총알처럼 빠르다.

지나온 삶이 아쉽다.

좀 더 진중하게 삶을 살아내지 못함에 회한이 인다.